21세기 정글경제에는 엄청난 유동성(liquidity)이 존재한다. 때로는 홍수처럼 넘치기도 한다. 이는 절제를 잃은 각국 중앙은행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금융의 귀재들이 이뤄낸 온갖 혁신들, 그들의 자유와 창의를(때로는 카푸친 씨와 같은 애꿎은 투자자를 속일 자유와 창의까지) 한껏 펼칠 수 있도록 한 규제완화 이데올로기의 합작품이다. 유동성은 정글경제를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의 생명수가 되기도 하지만 때로 난폭한 급류로 돌변해 그들을 덮치기도 한다. 금융과 투자를 이야기할 때 너무나 자주 등장하는 이 유동적인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들에게 정글경제는 더욱 위험해진다. 그렇다면 유동성은 도대체 무엇일까?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흔히 어떤 자산이 얼마나 쉽게 교환의 매개(medium of exchange)가 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말로 유동성이라는 용어를 쓴다. 화폐는 그 자체가 교환의 매개이기 때문에 가장 유동성이 높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금융과 투자의 세계에서 유동성이라는 개념은 그 쓰임새와 맥락에 따라 더 다양하고 유동적인 말이 된다. 우리는 크게 세 가지 맥락에서 유동성이라는 말을 자주 쓰고 있다.
첫째, 유동성은 어떤 금융자산을 얼마나 쉽게(또한 얼마나 빠르게) 팔아서 현금화할 수 있느냐를 따질 때 쓰는 말이다. 그 자산을 파는 데 오래 걸릴수록, 그리고 서둘러 자산을 팔기 위해 공정한 시장가격에 비해 큰 폭으로 값을 후려쳐야 할수록 유동성이 떨어진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자산을 즉각 팔아야만 할 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할인율(매수-매도 호가 차이)을 보고 유동성의 높낮이를 가늠한다.
물론 유동성이 가장 높은 자산은 현금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가장 좋은 가치저장 수단이라고 할 수는 없다.) 쉽게 찾아 쓸 수 있는 요구불예금은 만기까지 묶여있는 정기예금보다 유동성이 높다. 증권시장에서 쉽게 팔아 현금화할 수 있는 주식보다 매수자를 직접 찾아야 하는 비상장주식은 유동성이 떨어진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 투자자들은 그 가치를 쉽게 가늠할 수 없어 유동성이 떨어지는 서브프라임 모기지(subprime mortgage) 관련 파생상품보다 언제든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미국 국채를 선호했다. 한 번 사고 팔려면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드는 부동산은 유동성이 가장 낮은 자산 가운데 하나다. 보통 아파트보다 상업용 부동산의 유동성이 더 떨어질 것이다.
둘째, 일반 기업이나 금융회사나 가계의 재무상태를 이야기할 때도 유동성이라는 말이 자주 쓰인다. 전체 자산 가운데 급하게 현금이 필요할 때 서둘러 팔 수 있는 자산의 비중을 뜻하는 유동성비율(liquidity ratio)이 높을수록 재무상태는 안정적이라고 본다. 이 비율이 떨어질수록 제 때 빚을 못 갚아 부도를 낼 가능성이 높아진다. 회계장부상으로는 흑자를 내면서도(부채보다 많은 자산을 갖고 있으면서도) 당장 손에 쥔 현금이 없어 부도를 내는 기업은 유동성 관리를 잘 못한 것이다.
셋째, 시장에 전반적으로 돈이 얼마나 풀려 있는지 가늠할 때 유동성이라는 말을 쓴다. 통화 공급량과 정책금리 수준, 신용 여건에 관한 이야기에서 이 개념이 자주 등장한다. 시장에 유동성이 넘치면 인플레이션(inflation) 압력과 자산시장 거품 가능성이 커지게 마련이다. 유동성 홍수를 걱정하는 이들은 이 세 번째 의미의 유동성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유동성 개념이 서로 연관돼 있음은 물론이다. 예컨대 유동성이 넘치던 자산시장의 거품이 갑자기 꺼지면 유동자산이 충분하지 않은 금융회사나 기업이나 가계는 위기를 맞게 된다. (두 번째 개념) 그들은 자산을 제값을 받고 신속히 현금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첫 번째 개념)
카푸친 씨는 자신의 얇은 지갑을 볼 때마다 ‘그 많은 돈은 다 어디로 갔을까’ 궁금해한다. 하지만 그도 내 것이 아닌 많은 돈이 시중에 돌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 경제의 유동성은 과연 얼마나 될까? 한국은행이 매달 발표하는 통화와 유동성 지표를 살펴보자.
M1(협의통화): 주로 지급결제수단으로 쓰이는 돈이다. 민간의 현금통화와 언제든지 찾아 쓸 수 있는 요구불예금, MMDA(Money Market Deposit Account)처럼 수시로 넣었다 뺄 수 있는 저축성예금을 합한 것이다. 2010년 6월말 잔액(이하 같다)은 407조원이다. 이 가운데 현금은 30조원에 지나지 않는다.
M2(광의통화): M1에 만기가 2년 미만으로 비교적 짧은 단기금융상품을 합한 것이다. 단기 저축성예금(정기예금, 적금, 부금), MMF(Money Market Fund), 시장형 금융상품(양도성예금증서[CD], 환매조건부채권[RP], 표지어음), 2년 미만 금융채와 금전신탁, CMA(Cash Management Account)가 포함된다. 잔액은 M1의 4배가 넘는 1,648조원에 이른다.
Lf(금융기관유동성): 예금취급 기관을 대상으로 집계한 M2에 비은행금융기관까지 포함한 모든 금융권의 만기 2년 이상 금융상품을 더한 것이다. 잔액은 2,108조원.
L(광의유동성): 가장 넓은 의미의 유동성지표다. 금융기관이 공급한 유동성(Lf)뿐만 아니라 정부와 기업이 발행한 유동성 있는 금융상품을 다 합친 것이다. 국채, 지방채, 회사채, 기업어음이 다 포함된다. 잔액은 2,643조원에 이른다. M1과 M2처럼 ‘M’자가 붙은 것은 통화(money)지표, Lf와 L처럼 'L'자 돌림은 유동성(liquidity)지표로 구분하다.
지난 50년 동안 한국 경제의 유동성이 얼마나 늘어났는지를 보면 입을 다물 수 없다. 1960년 M2는 249억원에 불과했다. 그 후 10년 새 30배로 늘어났고 그 다음 10년 동안 다시 17배로 불어났다. 1980년대(11배)와 1990년대(4.8배), 2000년대(9년 간 2.2배)에는 통화증가율이 경제개발 초기단계보다는 낮아졌지만 그래프에서 보듯이 절대금액은 가파른 증가세를 보였다.
지난 반세기 동안 M2는 6만3,000배로 늘어났다. 1970년부터 2009년까지 39년 동안 명목국내총생산(GDP)은 2조7,751억원에서 1,063조591억원으로 383배로 늘어난 데 비해 같은 기간 통화량(M2)은 7,615억원에서 1,566조8,500억원으로 2,057배로 증가했다.
1995년 광의유동성(L)은 572조원으로 그 해 명목GDP(409조원)의 1.4배에 조금 못 미쳤으나 2009년(2,526조원)에는 GDP(1,063조원)의 2.4배 가까운 수준으로 불어났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계속된 2008년과 2009년에도 L은 11% 안팎의 높은 증가세가 계속됐다. 실물경제가 커지는 속도에 비해 통화량과 유동성이 엄청나게 빨리 불어났음을 보여준다. 이는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마찬가지였다.

2000년대 미국 연준(Fed)은 정책금리를 낮은 수준에 묶어둠으로써 적어도 가까운 장래에는 계속해서 금융시장에 유동성이 넘치도록 하겠다는 분명한 신호를 보냈다. 이에 따라 금융회사들은 언제든지 싼 돈을 끌어올 수 있다는 걸 확신하면서 유동성이 떨어지는 대출과 투자자산을 늘렸다. 이자부담이 줄어든 개인들은 더 많이 소비하고 더 무리하게 빚을 얻어 집을 샀다.
가계나 기업이나 금융회사들이 시장의 유동성이 갑자기 줄어들 것에 대비해 현금이나 다른 유동자산을 쌓아둘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앞서 살펴본 그린스펀 풋(Greenspan put)은 시장에 위기가 닥치면 언제든지 연준이 유동성을 공급할 것이라는 기대를 심어줬다. [정글경제의 원리 일곱 번째 질문 참조]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자 연준은 더 많은 유동성을 퍼부었다. 단기 기준금리를 제로 수준으로 끌어내렸을 뿐만 아니라 양적 완화(quantitative easing)를 통해 유동성 공급을 한껏 늘렸다. 이는 일시적으로 금융회사의 유동성위기를 해소하는 데에는 도움이 됐지만 실물경제를 살리는 데에는 기대한 만큼 효과를 내지 못했다. 은행에 그토록 많은 돈을 지원했지만 그들은 그 돈을 대출에 쓰지 않고 그냥 들고 있었다. 경제에 돈을 홍수처럼 쏟아 부어도 가계가 이 돈을 소비에 쓰지 않고 그냥 들고 있으면 효과가 별로 없다. 케인즈는 이런 상황을 유동성 함정(liquidity trap)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얼어붙었던 유동성이 다시 풀릴 때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느릿느릿 움직이던 유동성이 갑자기 급류로 돌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때 중앙은행들은 유동성홍수가 불러올 인플레이션 압력과 자산시장 거품 위험을 막기 위해 금리를 올리면서 유동성을 빨아들이려 한다.
역사적으로 중앙은행들이 그 일을 충분히 기민하게 수행한 경우는 드물었다. 그럴수록 카푸친 씨는 더욱 경계심을 갖고 유동성 수위를 살펴봐야 한다. 소규모 개방경제에 살고 있는 그는 국내뿐만 아니라 글로벌 금융시장의 유동성 수위는 어느 정도인지, 홍수에 대비한 치수와 방재시스템은 얼마나 치밀한지 따져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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