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예 & 인테리어2014. 11. 11. 19:29

목공예 명장1호 유석근 씨



35년 동안 목공예에 전념해 온 유석근 명장이 소반을 제작하고 있다.

  

  

   

“한낱 소반이지만 그 속엔 부처님가르침 오롯”

   

  명장 선정대회서 ‘1등’ 불구 장본인은 무덤덤

  칭호에 큰 집착 않는 ‘下心’ 공덕 의미 깨달아

 “사는 날까지 후손들에 전통미 전하며 살고파”

   

오래 전 소반(小盤)은 한국인들의 생필품이었다. 옛 사람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소반 위에 밥과 차와 술을 얹어 먹었다. 소반 위에서 목숨을 이었고 인정을 나눴다. 더없이 친근했던 가구는 입식 생활이 굳어지면서 옹색한 고물로 전락했다. 물론 숫자가 희박해지면서 값지게 됐고 이제는 차지게만 만들면 어엿한 예술품으로 평가받는다.


대한민국 목공예 명장 1호 유석근(53) 씨. 장인으로서의 이력 35년 동안 주로 소반을 만들었다. 소반을 위해 몸을 다쳤고 소반을 위해 빈한한 생계를 마다하지 않았다. 지역에서는 명장이란 평판과 함께 마당발 불자로 통한다. 소탈하고 붙임성 좋은 성격 덕분에 주변에 친구가 많고 ‘볼일’이 많다. 열에 아홉은 포교와 관련된 사람과 사건이다. 소반에 인생이 있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들었다는 유 씨. 앞으로도 소반을 위해 살 계획이다.


공주시청에서 웅진로를 따라 3㎞ 정도 가면 공산성입구 삼거리가 나온다. 다시 좌회전하면 무령왕릉 입구에서 마주치는 ‘한 목예사.’ 유석근 명장의 작업장이다. 지난 1월29일 그를 만났다. 나무로 된 소품이나 가구를 제작하는 장인을 소목장(小木匠)이라 부른다. 집이나 건물 따위를 짓는 대목장의 반대말. 정과 망치, 작업장에는 각종 공예도구들이 가득하다. 은은하게 퍼지는 나무 냄새를 맡으며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무를 깎은 지 어느덧 30여년이 흘렀습니다. 어렸을 때 그림 그리기를 무척 좋아했어요. 그때 익힌 손재주로 목공예기술을 배웠는데 이게 직업이 됐습니다.” 그가 목공예에 손을 댄 건 중학교를 졸업하면서부터다. 남들처럼 고등학교를 진학하고 싶었지만 집안은 등록금을 마련해주지 못할 만큼 지빈했다. 우연히 무료로 기술을 가르쳐준다는 ‘정수직업훈련원’이란 곳을 알게 됐고 곧장 상경했다. 학교를 마치고 서울의 공방들을 전전했다. 개인사를 감안하면 돈에 한이 맺힐 법도 하다.


그러나 웬일인지 돈을 더 주는 직장 대신 기술을 더 가르쳐 주는 직장에 마음이 끌렸다. “형편이 어려워 거의 세 달 동안 라면으로 끼니를 잇기도 했고 겨울에는 연료비가 없어 냉방에서 지내기 일쑤였죠. 하지만 옛 조상들의 숨결이 배어있는 소반을 만들고, 소반과 함께 있으면 세상살이 걱정 따윈 잊을 수 있었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오른손 엄지손가락 끝 부분이 잘려 나가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찬 데서 자고 조금씩 먹는 시절이 계속됐지만 꿈을 잃지 않았다.


그러다 기회가 왔다. 1988년 전국기능경기대회. 명장을 뽑는 첫 번째 대회여서 예년보다 유독 관심을 모았다. 지역예선을 통과한 내로라하는 목수들이 서울에 모였다. 유 씨 역시 경쟁에 뛰어들 자격을 얻었다. 그들에겐 3일 기한 안에 나무 보석함을 만들어내라는 과제가 주어졌다. 원래는 별달리 기대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에게 목공예를 전수한 은사도 출전한 상태였다. 제자가 스승을 제치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대충 엉망으로 만들어 출품했다간 스승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셈이다. 결국 은사가 봤을 때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솜씨만 발휘하자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웬걸, 욕심을 비우자 뒤통수를 맞았다. 1등을 해버린 것이다. 명장으로 선정되려면 단순히 순위만 높아선 안 되고 점수가 받쳐줘야 한다. 100점 만점에 90점 이상을 맞아야 하는데, 그의 점수는 96.7이었다. 가난한 청년 목수의 머리에 대한민국 목공예 부문 명장 1호라는 왕관이 씌워졌다. 


나라에서 인정한 명장이 최초로 탄생했다는 소식에 언론의 인터뷰 요구가 봇물 터지듯 밀려왔다. 기자들은 명장이라니까 으레 나이 지긋한 노옹을 연상했다. 막상 삼십 줄을 갓 넘긴 유 씨를 보자 아연했다. “그들은 신기해했지만 저는 그저 무덤덤했습니다. 명장이란 칭호에 미련을 두거나 집착을 갖지 않았으니까요. 부처님이 말씀한 하심(下心)의 공덕이라는 것. 그 때 조금이나마 그 의미를 깨달은 듯합니다.” 소반은 얼핏 단순한 물건 같지만 고도의 정교함을 요구한다.


“나무가 1cm만 어긋나게 엮여도 전체적인 모양이 의도했던 것과 완전히 딴판으로 나온다”는 게 유 씨의 말이다. “절제된 선 속에 화려함이 깃들어 있는 비범함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일상생활 속에서 워낙 다양하게 쓰이다 보니, 자연스러운 전통이 숨쉬기도 하고. 딱 부러지게 설명할 순 없지만 이래저래 매력이 많습니다.” 유 씨는 소반에서 우리 민족의 순박한 정서를 본다. “소반 앞에서 싸우는 사람 없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같이 마주해 머리를 맞대고 오붓하게 먹고 마시다 보면 금세 정이 들고 친해진다는 이야기지요.”


아울러 민족과 오래도록 함께 한 불교도 같이 봤다. “소반에는 보통 연화문(蓮花紋)이 새겨집니다. 개인적으로는 백제불교의 얼이 깃든 와당 문양을 좋아합니다. 8각 소반, 12각 소반 … 불교의 팔정도나 십이연기를 은유하고 있는 건 아닌지. 소반에 미쳐 살다보니 어머니 손에 이끌려 절에 다니는 기억이 조금씩 뚜렷해졌습니다.” 불교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절을 찾기 시작했다. 그의 계획 밖으로 또 다른 행로가 펼쳐졌다. ‘무애(無碍)’라는 법명을 받고 자주 절에 들러 부처님을 뵈었다.


또래의 불자들과 어울리게 됐고 자연스레 지역불교의 현황이라거나 포교의 방향에 관해 의견을 나누는 일이 잦아졌다. 불교를 위해 함께 힘을 모으자는 주변의 권유에 곧바로 승낙했다. 기능경기대회 이듬해인가, 공주불교청년회의 회장을 맡았다. 한번 총대를 메자 대한불교청년회 충남지부장에 수석 부회장이란 자리까지 득달같이 따라왔다. 2004년에는 공주불교신행단체연합회를 창립해 지금껏 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조계종 제6교구본사 마곡사 신도회 수석부회장도 겸임한다. 인근 사찰에 행사가 있으면 찾아가 봉사하고, 불우이웃을 돌보고, 교도소 재소자들을 위문하고 … 지역의 불자로서 힘을 보탤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뛰어든다. “우연히 신행단체를 이끌고 공주 불교계를 위해 일하게 된 것, 모두 부처님이 정해 준 인연이라고 여겨집니다. 앞으로도 불교를 위하고 종단에 도움이 된다면 발 벗고 나설 각오입니다.” 유석근 명장은 지천명을 넘겼다. 미래의 목표를 물었더니 “특별한 게 없다”는 대답. 여태까지 열심히 살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살겠단다.


다만 후손들에게 우리 소반의 아름다움을 전하기 위해 기록을 남기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갖고 있다. 단순한 전통계승이 아니라 새로운 우리 문화로 재창조하겠다는 의지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믿음의 발로.

 

유석근 명장은…

1957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난 유석근 명장은 1988년 11월 전국기능경기대회 명장부에서 우승하면서 우리나라 명장 1호라는 영예를 얻었다. 2002년 공주대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을 수료했으며 공주전문대 민속공예과 충청대 실내건축과에서 강사로 일하며 가구디자인을 가르쳤다.

충청남도 공예품 경진대회 심사위원, 충남미술대전 운영위원, 대한민국 명장 충남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공주불교신행단체연합회 회장과 6교구본사 마곡사 신도회 수석부회장으로도 활동하며 지역불교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공주=장영섭 기자 fuel@ibulgyo.com

 

[불교신문 2499호/ 2월11일자]

Posted by 탑스미네랄